<5분자유발언 전문>
존경하는 진주시민 여러분 그리고 의장님과 동료 의원님 시장님과 공무원 여러분, 초장 집현 미천 대곡 서정인의원입니다.
이 책은 약 30년 전인 1994년 진주시와 진양군이 통합되기 직전 마지막으로 발행된 진주시사 상권입니다.
이 책 앞부분 진주시 연혁, 삼국가야시대를 보면 ‘AD 42년에 시작된 가야시대에는 가야연맹의 고령가야로 추측되고, 삼국시대 후기에 와서는 백제의 영역 안에서 거열성으로 불리어 지다가 신라에 병합되었다'라고 기술되어 있습니다.
2001년도 발간된 진주시 의회사에서도 ‘고령가야의 고도로 추정되고 있다’라고 기술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같은 책 진주시사 300페이지 가야시대 마지막 부분에는
‘---지금까지 문헌학자들은 6가야 중 고령가야 아니면 가야 소국 거타국 등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하고, 이것을 근거로 진주의 자존심과 향토애가 작용하여 이 지역 사람들은 가야를 대표하는 6가야 중의 하나인 고령가야가 있었다는 주장을 아무런 비판 없이 받아들이고 있다.
그러나 남겨진 물질적 자료를 통해 역사를 연구하는 고고학의 입장으로 봤을 때 이 지역에 6가야 중의 하나인 고령가야가 있었을 가능성은 전혀 없으며 어떤 정치집단이 있었더라도 그것은 6가야 중의 하나가 아니라, 보다 세력이 작은 가야 소국 중의 하나일 것으로 생각한다’라고 기술하고 있습니다.
진주시사 한 권의 책에, 앞에서는 고령가야라 추정한다고 하고 뒤 서술에서는 고령가야가 아니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진주가 고령가야라는 학설이 어떻게 나오게 되었는지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이 책은 65년 전인 1959년 진단학회 이병도라는 역사학자가 쓴 한국사 고대편입니다. 이분은 일제강점기 ‘조선사 편수회’에서 활동한 식민사학자 중 대표적인 사람입니다.
이 책 388페이지를 보면, 아라가야는 현 함안, 대가야는 현 고령, 성산가야는 현 성주, 소가야는 현 고성, 고령가야는 현 진주?, 그런데 고령가야 진주에는 물음표가 붙어 있습니다.
다음 페이지 가야연맹 지도에서도 진주지역 고령가야에 물음표가 붙어 있습니다.
그리고 필자는 각주에서 이렇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고령가야는 주에서 함녕이라고 했으나, 다른 가야와 거리를 비교하면 너무도 떨어져 있으므로 잘못된 비정인 듯하고, 나로서는 진주의 옛 지명(거열)과 거리를 고려하여 진주에 비정하고 싶다.’ 이렇게 매우 애매한 표현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진주의 옛 지명 거열과 거타가 첫 음이 기억이니 고령이라는 말과 비숫하고, 지리적으로 다른 가야와 가까운 진주를 고령가야로 정하고 싶다는 필자의 바람을 적어 놓은 것으로 보입니다.
이 일 이후 ‘진주는 고령가야로 추정한다’ 라는 하나의 학설로 고정화된 것입니다.
진주 ‘초기역사’를 바로 밝히는 것은 우리 시의 정체성을 바르게 하는 중요한 일입니다. 있는 그대로 역사여야만 역사가 의미가 있고 교훈이 되는 것입니다.
본 의원은 9대 의회가 시작되면서 일명 가야사연구회라는 의원연구단체를 동료 의원님들과 구성하여 학자들의 강의도 듣고 현장 답사도 가는 등 진주가 고령가야가 아니라는 것을 주요 내용으로 하는 연구보고서를 제출하게 되었습니다.
마침 우리 시에서는 30년 만에, 14억의 예산으로 진주시사 편찬 사업을 착수하여 지난 9월에 ‘진주시사 편찬을 위한 용역’을 마치고 내년 상반기 중으로 본격적으로 집필에 들어갈 예정입니다.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의 두 사서에서도 고녕가야가 지금의 상주(함창)에 있었다고 분명하게 기록되어 있으므로 음상사와 거리를 근거로 고령가야를 진주라고 추정하는 견해는 재검토 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마지막으로 고고학적 조사에 따르면 진주는 고령가야가 아니라 소가야 계통임이 밝혀지고 있다는 것을 다시 한번 상기하면서, 부디 본 연구보고서가 진주시사 편찬에 꼭 참조되기를 기원합니다.
경청해 주셔서 감사합니다.